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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이슬람 상인 방문과 무역 문화 교류 이야기
답변: 고려시대 이슬람 상인들은 1024년부터 100여 명씩 3차례에 걸쳐 벽란도를 통해 한반도를 방문하여 향료, 수은, 보석 등을 교역하며 소주 제조법과 금속활자 기술을 전파하는 등 활발한 문화 교류를 펼쳤습니다.
천년 전 고려와 이슬람 세계를 잇는 해상 실크로드 무역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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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 전 고려시대, 한반도는 단순히 동아시아의 변방 국가가 아니었어요.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의 고려는 송나라, 원나라, 일본은 물론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지역 상인들과도 무역을 통해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건 이 시대의 고려가 벌써 글로벌 네트워크의 핵심 거점이었다는 점이죠!
당시 동아시아 국제무역의 핵심은 해상 실크로드였습니다. 이 거대한 무역망은 아라비아반도와 인도를 잇는 인도양 루트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중국을 거쳐 고려까지 이어졌어요. 마치 현재의 인터넷처럼 전 세계를 연결하는 거대한 네트워크였던 셈이죠.



예성강 하구 벽란도, 동양의 베니스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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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국제무역의 중심지는 바로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벽란도였습니다. 개경의 서문인 선의문에서 서쪽으로 30리(12km) 떨어진 예성강 하구변에 있었고, 벽란도의 동쪽에는 감로사가 있었습니다.
벽란도가 국제무역항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우선 지리적 조건이 완벽했어요. 수심이 깊어서 대형 범선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고, 고려의 수도 개경과 가까워서 정치적 중요성도 높았거든요.
벽란도의 국제적 명성은 대단했습니다. 송나라 상인은 물론, 아라비아와 동남 아시아 지방의 상인들도 자주 드나들었고, 진귀한 물건을 가지고 찾아오는 외국 상인들로 활기에 차 있었습니다. 당시 벽란도는 정말 동양의 베니스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였어요!



1024년 아바스 왕조 상인단 100명의 역사적 방문



고려사에 기록된 이슬람 상인들의 방문은 그야말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1024년 고려 현종 15년 9월에 하산 라자를 포함한 100여 명의 무슬림들이 한반도에 도착했고, 다음 해에 또 다른 100여 명의 무슬림 상인들이 왔다고 합니다.
이들은 단순한 상인이 아니었어요. 아바스 왕조의 사절로 추정되는 이들이 고려에 들어와 예물과 사절단을 교환하며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100명이라는 규모를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한 상단이었죠. 현재 기준으로 보면 몇십 대의 트럭으로 물건을 나르는 대규모 무역단과 같은 개념이에요.
특히 흥미로운 건 이들의 방문 시기입니다. 고려사에 대식국 상단이 등장하는 시기가 연중 9~11월에 집중된 것은 이때 바람을 타고 북상하기 좋은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계절풍을 이용한 범선 무역의 특성상 아랍 상인들은 3~4개월 정도 고려에 머물렀을 거예요.



이슬람 문명이 고려에 남긴 깊은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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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상인들이 고려에 가져온 건 단순히 물건만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문화와 기술, 그리고 새로운 생활양식까지 전해주었습니다. 내가 조사해보니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더라고요.
이슬람 상인들은 향료, 약재, 보석, 유리 제품, 코란 등 이슬람 문화를 담은 물품을 들여왔고, 고려에서는 금, 은, 인삼, 직물, 종이, 고려청자 등을 수출했습니다. 이런 교역을 통해 고려는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과 접촉할 수 있었던 거죠.
아라크에서 소주로, 증류기술의 놀라운 여행



고려시대 이슬람 문화 전파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바로 소주의 전래입니다. 여러분 혹시 소주가 원래 아랍에서 온 술이라는 걸 아셨나요? 정말 놀라운 이야기예요!



소주의 연원을 고려시대로 잡으며, 다시 그 연원을 캐올라가면 원조는 아랍에 가 닿습니다. 기원전 3천년께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진 증류주는 오늘날까지도 중동 아랍지역에서 '아라끄'란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몽골군이 1258년 압바스조를 정복할 때 아라끄 양조법을 배워갔고, 이후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의 개성과 안동, 제주도에 주둔하면서 이 기술이 전해진 거예요. 고려에는 특히 몽고군의 주둔지였던 안동과 개성·제주도는 제조법이 발달하였으며, 최근까지도 그 전통이 유지되어 유명했습니다.
정말 신기한 건 지역별 명칭이에요. 소주를 아라비아어로 아락(arag)이라 하고, 만주어로는 알키라고 하며, 우리나라 평안북도지방에서는 아랑주, 개성지방에서는 아락주라고 합니다. 이름 자체가 아랍어 기원임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죠!



황금빛 향료와 투명한 유리공예의 전래



이슬람 상인들이 가져온 또 다른 보물은 향료와 유리공예품이었어요. 아라비아 상인들도 수은, 향료 같은 것을 가지고 벽란도에 드나들었는데, 고려라는 이름이 이 때 이들에 의하여 서양에 알려져, 외국에서는 지금도 우리 나라를 코리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당시 고려 귀족 문화에서 아라비아산 향료와 보석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어요. 고분에서 출토된 이국적인 유리잔들은 이슬람 문화의 직접적 영향을 보여주는 증거물이죠. 고려 불화와 청자에서도 페르시아나 중앙아시아 계통의 문양이 발견되곤 한다니, 정말 문화 융합이 활발했던 시대였네요.
특히 벽란도에는 회회인들을 위한 이슬람 사원이 있었고, 중국에서 온 상인들을 상대하기 위한 당녀라는 중국 출신의 기녀 또는 매춘부까지 있었습니다. 정말 국제적인 도시였던 거죠!



원간섭기, 이슬람과 고려의 더욱 깊어진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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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원간섭기가 되면서 이슬람과 고려의 만남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했어요. 이제 단순한 무역을 넘어서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서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된 거죠.
원 간섭기에는 색목인들이 고려로 들어왔는데, 이 집단은 주로 중앙아시아 출신의 무슬림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몽골 사회 질서에서 색목인은 몽골인들 바로 아래의 위치를 차지했고, 원나라 내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고려사회에 뿌리내린 색목인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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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단순히 거주만 한 게 아니라 고려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어요. 충렬왕 시절 무슬림 민보는 고려에 귀화하여 대장군 벼슬을 받았고, 응방(매의 수집과 관리부서)과 사역원(통역관 양성소)에도 다수의 투르크인들이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당시 개성 일대에는 무슬림 집성촌까지 형성되었다고 해요. 정말 다문화 사회의 선구적 모습이었죠! 그들은 고유의 종교와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고려 사회에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갔습니다.
세계무대에 우뚝 선 고려의 국제적 명성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고려의 명성이 세계로 퍼져나간 것도 엄청난 성과였어요. 우리나라의 영어식 표현 'Korea'는 외국인들이 '고려'를 발음하면서 생겼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렇다면 Korea를 널리 알린 사람은 이슬람상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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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놀라운 건 고려인들의 해외 진출도 활발했다는 점이에요. 중국 광저우박물관에 소장된 한 묘비문에는 1312년에 고려인 라마단이 와서 병을 얻어 사망한후 이슬람 묘역에 안장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슬람 이름을 가진 고려인이라니, 정말 국제적 인물이었을 것 같아요.
고려시대 이슬람과의 교류는 단순한 무역을 넘어서 진정한 문명 간의 만남이었습니다. 1000년 전 우리 조상들은 이미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고 세계와 활발히 소통하고 있었던 거예요. 벽란도를 중심으로 한 이 놀라운 교류사는 오늘날 K-컬처의 세계적 확산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현재도 전 세계 무슬림 인구는 18억 명에 달하고, 할랄 시장 규모는 매년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1000년 전 고려와 이슬람 세계의 만남이 현재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죠. 과거의 교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의 협력 방안을 모색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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